4. 세체니 다리와 부다페스트
4. 세체니 다리와 부다페스트
  • 장두식(일반대학원) 초빙교수
  • 승인 2017.09.26 18:17
  • 호수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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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인문지리지

벨라 4세에 의해서 새로운 수도가 된 부다페스트는 두너강(다뉴브강)의 진주라는 말처럼 정말 아름다운 도시다. 부다페스트에 처음 여행 온 사람이라면 두너강을 따라 천천히 걷는 것이 첫 번째 여행코스다. 페스트에서 부다 쪽 바라보면서 걷는 것이 좋다. 데악떼르에서 바치거리를 가로질러 가다보면 두너강이 나온다. 강 건너 편 언덕에 있는 왕궁을 감상하면서 걷다보면 어느새 고색창연한 세체니 다리를 만날 수 있다.

▲ 세체니 다리

세체니 다리는 두너강에 처음으로 건설된 다리다. 이 다리가 바로 부다페스트라는 도시를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원래 부다시와 페스트시는 두너 강을 사이에 둔 각기 다른 도시였다.

이 다리 건설의 주역은 세체니 이슈트반 백작이다. 그는 헝가리가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던 시기 개혁성향의 진보적인 귀족이었다. 당시 황제 페렌츠 1세는 1795년 헝가리 비밀결사 조직인 마르티노비치 관련자들을 처형하고, 1821년 헝가리 국회의 의원 수를 일방적으로 줄이고 세금을 무리하게 올리는 등 강압통치를 자행했다. 이에 그는 1825년 사비를 들여 헝가리 국립 학술원을 세웠다.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헝가리의 정신과 문화를 강화시켜야 한다는 현실인식에서 나온 적극적인 실천이었다. 베르제니 다니엘의 다음과 같은 시를 읽어보면 그의 실천을 이해할 수 있다.

 

세계의 끓어오르는 슬픔의 바다, 헝가리여/.....<중략>.....자고 있는 민족의 얼을 깨우라/푹풍은 절규한다, 엄청난 위험이 닥쳐온다!/두렵지 않다. 뿔피리의 굉음소리가,/울부짖는 준마들의 도약이./용감하게 지켜보겠다, 큰 민족이 아니라 얼과 자유를 가진 민족이 기적을 이루어 낸다는 것을! (베르제니 다니엘 <헝가리인들에게 2(A magyarokhoz 2) 1807> 중에서)

 

세체니 백작은 부다시와 페스트시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는 것이 헝가리 발전에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여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그리하여 1849년 스코틀랜드의 건축가 윌리암 클라크와 아담 클라크를 초빙해 다리를 건설했다. 이 다리에 의해서 비로소 부다시와 페스트시가 하나의 정치·경제·문화권으로 연결됐고 1873년 부다시와 오부다시 그리고 페스트시가 합쳐져서 지금의 부다페스트시가 됐다. 페스트 편 다리 입구에는 건축가를 기리는 동판이 있고 학술원 앞 작은 공원 안에는 세체니 백작의 동상이 서 있다. 이 다리를 부다페스트 시민들은 사슬다리(Lanchid)라고 부르는데 현수교의 케이블에 조명을 달아 어두워지면 체인으로 연결된 다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부다페스트 야경을 보기 위하여 겔레르트 언덕에 올라가서 두너강을 내려다보면 정말 사슬 다리처럼 보인다.

▲ 세체니 다리 야경

세체니 다리는 우리 드라마 <아이리스>의 배경이 되기도 했고 여성 듀오 다비치의 <또 운다 또> 뮤직비디오의 주요 공간으로 등장하여 우리에게도 조금은 친숙하다. 관광객들이 항상 붐비지만 다리를 천천히 걸어서 건너며 <또 운다 또>를 나직이 불러 보아도 좋지만 노랫말이 좀 애절하다. 세체니 다리는 헝가리 근대화의 상징이니까 이 다리는 좀 더 밝은 노래가 어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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